얼마 후 그 여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얘기를 꺼냈다.
"그래, 집을 나설 때부터 생각은 하고 왔다만 이왕 이리 발걸음 한 김에, 네가 나이와 다르게 속이 아주 깊고 믿음이 가니, 우리 삼대 독자 아들이 어쩌면 좋을지 한번 네 얘기도 들어보고 싶구나."
"예. 좋게 보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점화는 예를 갖춰 상담방으로 안내했다. 강무녀가 따뜻한 차를 잔에 따라주고 나갔다.
그 여자는 차를 들지도 않고 체념하듯 말했다.
"실은 우리 아들의 혼담이 깨져버렸단다. 아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렸고... 근자엔 꼭 상사귀에 씌인 사람마냥 헛소리까지 하고......"
그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옷고름을 눈가로 가져갔다.
"예.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있었군요. 혹시 신부 측에서 사주단자를 돌려 보내면서 무슨 말은 없었습니까?"
그 여자가 한숨부터 푹 내쉬었다.
"... 궁합도 안 맞고 우리 아들이 신부를 요절시킬 팔자라나 뭐라나 그러면서... 둘이 서로 연모하는 사이고 해서 무탈하게 성혼이 될 줄만 알았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점화는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애써 진정하며 그 아들의 생일과 성함을 물었다. 이름은 '윤함', 나이는 자신보다 두 살이 많았다. 이름과 생일을 적고 천세력을 뒤적여 사주 간지를 적던 점화는 하마터면, "이 사주가 어째서 신부를 요절시킬 팔자란 말이냐,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허황된 말을 했단 말이냐"면서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점화는 사주를 재차 살피며 묵상하다가 그 여자의 손을 잡고서 힘주어 말했다.
"아드님은 따사로운 봄볕 같은 팔자입니다. 만인을 따스하게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귀한 사주입니다. 미물 하나 함부로 못 죽이는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 햇살이 먹구름에 가려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여자가 점화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눈물어린 눈을 빛내며 물었다.
"먹구름에 가려 있어?"
"예."
"그럼 어찌 해야 되느냐?"
"때가 되면 먹구름은 자연히 지나갑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급하니 바람이라도 일으켜 먹구름이 흩어지게 해야 합니다."
"... 바람이라도 일으켜?... 그게 무슨 뜻이냐?"
"그보다, 저를 믿는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믿는다."
"그러면, 제가 아드님 방에 들어가 관상을 보게 해주십시오."
"관상 아니라 볼기상이라도 보거라. 어찌하든지 우리 아들이 일어나 밥만 먹어도 소원이 없겠다."
점화와 그 여자는 잠시 얘기를 더 나눴다.
그 여자가 마당으로 내려서다 말고 강무녀에게 차 잘 마신 값이라며 선뜻 돈을 내주었다. 강무녀가 경우가 아니라며 고사하자, 그 여자는 이러면 내가 더 경우가 아니라며 적잖은 돈을 마루에 던져 놓고 총총걸음으로 명선방을 나갔다.
다음날, 점화는 약조한 대로 그 여자 집에 당도했다. 사방이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강무녀가 점화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하인이 나와서 점화를 은밀하게 안내했다. 강무녀는 다른 처소로 갔다.
점화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탁한 기운이 훅 느껴졌다. 윤함이 누운 자리에서 겨우 상체만 일으켜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윤함이 기력이 다한 손짓으로 점화에게 앉으라고 했다.
점화는 방문 바로 앞에 앉았다. 윤함이 맥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관상 보러 온 것 아니냐? 가까이 와서 보거라."
점화가 또렷하면서도 다정하게 답했다.
"이미 다 봤습니다."
"... 거기서는 내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텐데, 뭐를 다 봤다는 것이냐?"
"아드님의 따스한 봄볕 같은 마음, 모질지 못해 늘 상처 받는 선한 마음... 입니다."
점화의 음성에 자신도 모르게 촉촉한 기운이 묻어났다.
윤함은 점화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모친의 간절한 요청으로 부득불 관상 보는 것을 받아들였는데 정작 관상은 보지 않고, 자신의 타고난 성정을 헤아리면서 애석해하는 점화가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윤함이 어깨를 조금씩 움직이면서 무심히 물었다.
"... 그래서... 너의 결론은 무엇이냐? 밥 먹고 기운 내라는 말이냐?"
점화가 윤함의 눈을 직시하며 다부지게 답했다.
"저와 함께 동업을 하는 것입니다!"
윤함이 갑자기 실소하며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그러다 뭐를 잘못 들은 사람마냥 되물었다.
"... 뭐? 동업?... 너와... 내가... 동업을 해?"
점화가 거침없이 분명하게 답했다.
"네! 지금 아드님처럼 고통을 받게 만드는 혹세무민하는 자들을 잡아 족치는 동업입니다. 족치는 일은 제가 할 테니 아드님은 혼담이 깨져 상사병 중에 있는 청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는 일을 하십시오. 하시던 글공부 계속 하시다가 이런 일이 생기면 한번씩 명선방에 모여서 행하면 됩니다."
윤함은 한참 동안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점화를 바라보았다. 촛불 건너편에서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는 점화의 오롯한 소망에 사로잡힌 듯 했다.
그러다 시선을 거두고 헛기침을 하며 무심하게 툭 말했다.
"... 그래도 내가 남잔데, 한다면 족치는 일은 해도 내가 해야 되겠지."
"네. 그럼 제가 위로하고 보듬는 일을 하겠습니다."
"... 근데 모친께 익히 들었다만, 이리 당차고 맹랑한 너는 나이가 어떻게 되냐? 나랑 비슷해 보이기도 하다만."
"제가 두 살 어립니다. 오라버니!"
윤함이 티나게 헛움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 허! 뭐, 오라버니? 누구 마음대로!"
"제 마음입니다. 오라버니!"
"... 허! 네가 정말 맹랑하긴 맹랑하구나. 그건 그렇다 치고, 네 가족은 어떻게 되고?"
"부모님 형제 없고 스승님과 같이 살아왔는데 얼마 전에 투옥되셨습니다."
윤함이 "저런!" 하면서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그러면 그 명선방이라는 데서, 너 혼자 지낸단 말이냐?"
"강무녀님이라고 근처에 사시는 분이 수시로 와서 돌봐주십니다."
"... 그래, 다행이구나. 근데 너도 참 외롭게 컸겠다. 나처럼... 나도 형제가 없는데."
"저는 사실 술서 이치에 빠져서 외로울 틈도 없었습니다."
윤함이 바르게 앉으려고 허리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 아! 너는 그랬겠구나! 근데, 네가 방금 말한 그 술서 이치란 것이 도대체 뭐길래, 궁합이 어떻다 저떻다 혼담을 깨고, 겁박해서 부적을 쓰게 하고, 멀쩡한 묫자리를 이장하게 하고, 도대체 왜 그 난리들인 거냐?"
윤함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 실려 있었다.
점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술서 이치가 아니라 술사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난리들입니다. 그래서 오라버니와 저의 동업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그런 허황된 일들이 얼마나 큰 폐해를 가져오는지 이치적으로 따져 물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러한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단죄를 가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오라버니 같은 선량한 피해자만 늘어날 뿐입니다."
윤함은 공감이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나지막하게 물었다.
"... 이 험한 세상에, 권모술수가 판을 치고 세도가의 눈밖에 나면 졸지에 신세 망치는 세상에, 너는, 그것도 여린 처자 몸으로 겁도 안 나냐?"
점화가 나긋하게 힘주어 답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지켜주셔야지요!"
"... 허! 얘 봐라. 점점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오라버니는 만인을 따스하게 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팔자이고, 저는 한 사람이라도 살려내야 직성이 풀리는 팔자예요. 이런 궁합이 실로 좋은 궁합인 거지요!"
윤함이 점화를 가까이 오도록 손짓했다. 점화가 일어나 관상을 볼 수 있도록 다가가 앉았다.
"... 자, 편하게 내 얼굴을 보거라... 내년에 급살 맞을 것 같지는 않냐?"
점화가 관상을 보며 말했다.
"네. 오라버니는 급살 맞지 않아요. 다만 조건이 있어요. 액땜이라고 아시지요? 저와 동업을 해서 한 청춘이라도 살리고 한 술사라도 일깨우는 일이 오라버니가 액땜하는 거에요."
"... 그래서 그 동업 얘기 하려고, 모친께 내 관상을 보게 해달라고 했던 것이냐?"
"오라버니 사주를 보는 순간 이 사람은 권세의 길이 아니라 활인의 길로 나서야 한다, 이 사람은 그래야 더 행복하다는 판단을 했고 실제로 이렇게 만나서 대화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어요."
윤함이 점화와 눈을 맞추며 힘주어 물었다.
"... 네가 모친께 말했다는, 바람을 일으켜서 먹구름을 흩어지게 해야 한다는 말은, 결국 나의 내면의 변화를 통해 상사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말이었더냐?"
"네."
"... 그 내면의 변화라는 것은 결국 나의 가치관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활인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야 결국 더 행복해진다는 것이고?"
"네."
윤함은 허리를 곧게 펴고 천정을 올려다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 그래, 네 속 깊은 뜻이 무언지 잘 알았다. 상사귀에 씌여 식음을 전폐한 못난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네가 있어서 정말 힘이 되고 고맙다. 내 숙고해 보고, 조만간 명선방에 한번 들르마. 밤도 늦었고 갈 길이 멀 텐데 이만 일어서거라."
점화가 윤함의 손을 잡으며 살갑게 말했다.
"저에게 '내 누이동생 점화야!' 하고 한번 불러보세요."
윤함이 겸연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