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화는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이 시간이면 늘 스승님과 차를 마셨었다.
강무녀가 졸린 눈을 하고서 점화 옆에 앉았다.
"사람이 들어왔는지 나간지도 모르고... 그렇게 넋을 빼고 앉아 있으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더라.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냐?"
"... 아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딴판이라는 것이요. 점괘를 아는 것과 피할 방도를 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것과 행함의 어려움, 행함의 중함, 행함의 무게... 같은 것이요."
점화의 음성에는 깊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강무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온종일 어려운 말만 들어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재미나는 것 좀 생각하고 그래라. 맨날 그렇게 딱딱한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누가 너를 데려가겠냐."
"저는 벗도 낭군도 필요 없어요. 술서가 벗이자 낭군이에요."
"왜, 평생 이술사님 곁에서 술사 노릇만 하다 죽을라고?"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허이고, 그 놈의 천대 받는 술사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점화가 잔을 내려놓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음양 오행의 이치에 빠져들다 보면 천대니 환대니 하는 신분의 껍데기들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요."
강무녀가 들던 잔을 놓으며 대꾸했다.
"너 말 잘했다. 음양의 이치란 게 뭐냐. 간단히 말해 남녀가 서로 만나 정분나고 그러면서 사는 것 아니냐. 그래서 궁합도 보는 거고. 그런데 누구보다 그런 것을 잘 아는 술사가 끝까지 혼자 살겠다는 심보는 뭐냐?"
"그보다 더 크고 넓은 음양 이치의 세상도 있거든요."
"허이구, 점점..."
"말하자면, 더 큰 하나를 얻기 위해 작은 하나를 희생하는 것이지요."
"...... 남녀가 어울려 살아야 사람 사는 이치를 더 알고, 그래야 세상 인심 돌아가는 이치도 더 알고, 그래야 찾아오는 손님한테 더 이치에 맞는 방도를 전할 것 같다만..."
강무녀의 잔에 차를 따르며 점화가 힘주어 답했다.
"문제는 마음속의 잡념이지요. 술사는 정신을 오롯이 하나로 모으는 내공이 없으면 끝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고독, 고행, 고요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이고요. 잡념이 생기면 사주나 주역의 문자만 보일 뿐 그 문자 너머의 문자는 보지를 못해요. 마치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손가락만 보고 달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요."
강무녀가 어려운 말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점화가 순하게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명선방 현판을 쓰시면서 그러셨어요. 명선방은 명리를 화두 삼아 선의 경지로 나아가는 곳이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참으로 마음에 와닿아요."
"...... 그러면 차라리 중이 되지 왜 술사가 된다니?"
"중과 술사는 다르지요. 술사와 무당이 다르듯이요. 중은 속세를 떠난 생을 살고, 무당은 이승과 저승을 매개하는 생을 살고, 술사는 속세 속의 비속세의 생을 사는 것 같아요."
강무녀가 졌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 하여튼 너나 이술사님이나 그렇지 않아도 힘든 세상, 참 고단하고 피곤하게 살려는 사람들이다. 그나저나 한잠도 못 자고 피곤할 텐데 눈부터 좀 붙여라."
"그보다 아줌니 걱정이 더 커요. 저 때문에 아줌니 일도 못 보시잖아요."
"지금 내 일이 문제니. 그리고 혹여 이런 일이 생기면 너 보살펴 주라는 품삯 같은 거를 옛적에 다 받았다. 그러니 내 걱정 할 거 없고 오직 너만 무탈하면 된다."
점화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옛적? 언제 적이요?"
"하이고, 그 말 다 하려면 몇 밤을 새도 모자랄 거다."
"조금만 들려주세요. 지관 술사님과도 연관이 있는 이야기지요?"
"그럼 연관이 있지. 우리 셋은 한편이었는데..."
점화가 궁금하다는 듯 다가앉으며 말을 재촉했다.
강무녀가 뭔가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자, 점화가 잔에 차를 따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강무녀는 점화의 한결 안정된 표정을 보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이술사님. 점화가 이제야 좀 안정이 되나 봐요. 이처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점화가 평정심을 되찾도록 하는 데만 온 힘을 기울여 달라시던 그 당부 말씀 잘 기억해요. 점화는 내가 곁에 있으니 염려하지 마시고 부디 몸 조심하세요.'
동녘 저편에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남산골 이곳 저곳에서 참새 소리가 들려왔다.
점화는 스승님과 함께했던 것처럼 남산골을 산보했다. 명선방 현판을 어루만지고, 마당에서 몸을 움직여 호흡을 고르는 동작을 거듭했다. 강무녀는 명선방 부엌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손이 닳도록 빌고 있었다.
점화가 부엌에 들어가 조반 준비를 하며 말했다.
"오늘부터 저는 스승님 돌아오실 때까지 차가운 음식만 먹을 거예요."
강무녀는 그 고집 익히 아는지라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강무녀가 걸레를 뺏어서 점화 대신 방바닥을 닦았다.
점화는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붓과 종이, 사주 보는 데 쓰는 천세력, 점치는 데 쓰는 서죽과 죽편 등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이 스승님의 손때 묻은 주역 책을 펼쳐, 자신이 숙지하고 있는 예순네 괘의 괘사가 맞는지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강무녀가 걸레질을 하다가 흘끔거리며 물었다.
"김술사 패거리들이 언제 해코지할지도 모르는데 겁도 안 나냐?"
점화가 다부지게 잘라 답했다.
"여기는 명선방이에요!"
강무녀는 한편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 안심이 안 되어 되물었다.
"오늘의 점괘는 뽑아봤냐?..."
점화는 대답없이 보일 듯 말 듯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준비를 마친 점화는 스승님이 다른 술사들에게 하시던 말씀을 회상했다.
'의복이 화려하다고, 위세를 부린다고 기죽거나 넘겨짚으면 안 되오. 술사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주 기운을 보는 사람이오. 술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보는 사람이오.'
두 여자가 찾아왔다. 마루에서 서책을 읽고 있던 점화를 보고는 두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김술사의 집에서 본 사람들이었다.
점화가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근데, 너 혼자 있냐?"
"예. 스승님이 사정이 있어서 제가 대신 손님을 맞고 있습니다."
두 여자가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래. 우리가 이렇게 온 것은, 너에게 고맙다는 표시도 하고 싶고, 네가 말한 명선방이 어떤 곳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겸사겸사 들렀단다. 아늑하고 조용하니 좋구나."
"예. 잘 오셨습니다."
한 여자가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거... 얼마 되지 않지만 고마움의 표시다. 네가 아니었으면 적지 않은 부적 값만 날릴 뻔했다. 그러니 아무 말 말고 받아 두거라."
점화가 예를 갖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그 집에서 그렇게 행한 것도 경우가 아닌데 사례까지 받으면 더욱 경우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내년에 급살 맞을지 여부는 그때 가봐야만 압니다. 저는 제 판단을 믿었기에 그렇게 말씀 드렸을 뿐입니다."
그 여자가 점화의 눈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가 그 집에서 나온 후에 긴가민가 걱정이 태산 같아서 바로 신점 치는 집을 찾아갔단다. 그런데 거기서 하는 말이, 내년에 급살은커녕 급제할 팔자라고 하면서 조상굿을 해줘야 운수가 펴진다고 하더구나. 그때부터 어쨌든 급살은 아닐 것 같다는 마음이 들고, 너의 그 확신에 찬 말도 떠오르고 해서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단다."
"예. 그 심정 잘 이해됩니다. 여기 명선방에 오시는 손님들 중에도 그런 일을 겪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술사 점쟁이 무당의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아 괴로웠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렇구나... 그래도 뭔가 보답을 하고 싶구나."
"괜찮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보답하신 겁니다."
두 여자는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 점칠 일이 어디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이번 점괘가 맞든 안 맞든 또 오마. 이래 봬도 우리가 대접받고 사는 사람들이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그 여자는 말을 마치려다 말고 이어갔다.
"그런데 참 묘하더라. 그 집에서 급살이라는 말을 들을 때는 우리 아들이 꼭 죽을 것만 같더란 말이다."
점화가 허리를 곧게 펴고 담담하게 말했다.
"예. 급살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을 들게 합니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심기가 어지럽거나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으면 그런 기운에 쉽게 휩싸이게 됩니다. 그럴수록 심지를 굳게 해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이 더 커지다 보니 점집을 찾기도 합니다. 혹여 근자에 평소와 다르게 불안한 기운을 느끼신 적이 있었습니까?"
두 여자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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